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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뉴스레터] 조화와 창조의 여정, 한국 디자인의 역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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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담당자 2025-09-23 16:23:37
COLUMN+
조화와 창조의 여정
한국 디자인의 역사와 미래
한국 디자인은 한국인의 삶과 정신을 담아내는 일상 속 물질과 서비스로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 왔다. 사용자의 필요와 가치를 반영하기 위해, 20세기 이후 급변했던 기술 중심의 사회 속에서도 한국인들의 삶과 정서를 유지하면서, 세계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 왔다. 본 글은 한국 디자인의 뿌리를 근대기에서 찾고, 현대 사회에서 그 고유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조혜영
한국디자인사학회 회장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디자인학과 조교수
근대기 한국 디자인의 원류
조선시대 말부터 한국 사회는 서구 문물을 만나면서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디자인’은 서구의 개념으로 아직 사회 전반에서는 정확히 인식되고 있지 못했지만, 전통적인 수공예가 공장제 대량 생산 방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정서와 실용성이 어우러지며, 시각적 상징체계와 풍속과 결합해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했다.
근대기 한국 디자인 문화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성됐다. 첫째, 서구로부터 유입된 신문물과 기술이다. 전차, 자동차, 기차 등의 교통수단과 전등, 전화와 같은 통신을 도입하면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기술의 형태와 사용성이 디자인의 개념으로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둘째, 전통의 수공예와 미의식이 근대적인 생산방식과 제조술에 맞게 변형 혹은 재해석됐다. 근대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 깊이 자리했던 한옥, 한복, 자수, 도자기, 가구 등 전통 공예품은 서구의 조형 원리를 흡수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근대를 여는 모빌리티 공간, 기차
새로운 기술과 시스템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차와 철도의 도입이었다. 개항 이후 한국은 바다를 통해 들어온 문명과 문화를 신문물로 인식했고, 이를 다시 내륙으로 운반하며 새로운 모빌리티 개념을 경험하게 됐다.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부산과 만주로 이어지는 철로와 기차는 각 지역에 플랫폼을 설치하는 계기가 됐고, 기차역은 곧 20세기 유통망을 여는 새로운 거점으로 자리했다.
경성역은 1900년 경인철도의 정거장으로 개통된 뒤, 1919년 서대문역이 폐지되면서 사실상 서울의 중앙역 역할을 맡게 됐다. 1917년부터 한국 철도를 위탁 관리하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1922년 기존 역 신축 공사에 착수해 귀빈실과 일·이등 대합실, 그리고 200명이 동시에 연회를 즐길 수 있는 대식당 등 최신 시설을 갖춘 새로운 역사를 완공했다. 이는 단순한 교통 거점을 넘어 서양식 요리와 커피, 차를 즐기며 사교와 교류가 이뤄지는 근대적 생활 무대로 기능했다. 또한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 문학 작품의 배경으로도 등장하면서, 경성역은 한국인이 근대적 감성과 새로운 도시 문화를 경험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경부선 기차는 이동 중에도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디자인했다. 침대칸 복도에는 외부를 조망할 수 있는 긴 창을 설치했으며, 1등 객실 내부에는 유리공예 장식의 조명과 짐칸, 천장 선풍기 등을 마련해 세련된 생활 양식을 제안했다. 이러한 공간적 연출은 이동 자체를 하나의 경험으로 확장시켰으며,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근대적 감각을 일깨우는 디자인적 요소로 작용했다.
한복의 변용적 디자인, 교복
한국인들의 풍속과 전통에 새로운 서양식을 적용하거나 실용성을 반영한 예로는 여학생들이 입던 통치마가 있다. 한복을 개량하여 만든 여학생 교복은 계층이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의 새로운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상이 됐다. 원래 입던 한복의 길이를 짧게 하고 착용 방식을 달리해,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형태로 재해석한 것이다.
근대기 여학생들이 입던 통치마는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함께 입을 수 있도록 개량한 형식이다. 여성들은 전통적인 한복을 변형하여 치마에 어깨끈을 달아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고, 활동이 편하도록 길이를 짧게 조정했으며, 저고리에는 서양식 옷감을 사용해 변화를 주었다.
이전의 한복 치마는 허리에 끈을 대어 묶는 방식이었으나, 1911년 이화학당의 미스 월터와 파이가 여학생들의 활동 편의를 위해 어깨끈이 있는 치마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디자인은 체육 활동 중 옷이 쉽게 벗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검은색 치마에 조끼 모양의 어깨와 허리를 덧댄 통치마 형태로 확립됐다.
따라서 이 시기 한국 디자인의 특징은 과도기적 혼종성과 실용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통과 근대의 요소가 공존하거나 뒤섞인 형식과 요소들이 많았는데, 한복의 변용적 디자인에서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문양을 현대적인 인쇄물에 적용하거나, 서양식 건축 양식에 한옥의 요소를 가미하는 식의 사례들이 나타났다. 또한, 근대 문물의 도입은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디자인을 요구했다. 기능적으로 효율적이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형태를 추구하면서도, 그 안에 한국인 특유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근대 문물의 일상화, 시각 디자인
시각 디자인 분야에서는 상업 광고와 인쇄물이 발달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담배, 화장품, 식품 등의 광고 포스터에 근대적인 서양식 삽화와 한글 서체가 조화롭게 사용됐다. 이는 서구의 시각적 언어를 차용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책이나 신문의 제호 디자인, 폰트 디자인 등도 근대적인 인쇄 기술과 만나 새롭게 발전했다.
개항기에 수입된 성냥은 1910년대 인천을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서면서 대량 생산됐다. 초기에는 원숭이가 성냥 포장에 등장했으나, 이후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성냥회사들은 다양한 상징을 라벨과 포장에 담아 한국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또한 해방 후 문교부에서 출판한 교과서는 표지에 한글 가로쓰기와 한국 전통 문양을 적용해, 새로운 근대 학문과 가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담았다.
한편, 1970년대 후반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되며, 여성지는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주요 매체로 자리했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은 1950년대 유럽에서 유행한 여름휴가인 바캉스의 개념을 접하게 됐고, 자본주의와 글로벌 문화를 한국의 풍토와 생활 문화에 맞게 누리게 됐다. 이 과정에서 노동과 놀이, 일터와 휴식의 공간이 순화하는 가족 중심의 소비문화가 활성화됐고, 여성지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담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사물 디자인에서는 가구, 식기, 의복 등 일상용품이 변화했다. 전통적인 목가구는 서양식 가구의 영향을 받아 크기와 형태가 간결해졌고, 서양식 식기인 컵과 접시에는 한국적인 문양이 새겨지기도 했다.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의복이다. 한복은 편리성을 위해 저고리의 길이를 줄이고 치마폭을 좁히는 등 실용적인 형태로 바뀌었고, 서양식 양복이 점차 도입되면서 한복과 양복이 혼재하는 독특한 복식 문화가 형성됐다.
이러한 디자인 사례들은 단순히 미적인 변화를 넘어, 한국인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근대기 디자인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의 충돌 속에서 한국인들은 그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근대기 디자인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창조적 재해석의 산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개량 한옥은 서양식의 편리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가족 중심의 생활과 공동체 문화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노력의 결과이다. 한글 쓰기는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민족의 언어를 지키고자 했던 저항 정신의 발현이기도 하다. 이처럼 근대기 한국 디자인은 격변의 시대 속에서 한국인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경험하게 하는 물질문화였다.
디자인으로 미래 도시를 선도하는 부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은 디자인을 일상화하고, 환경과 물질 그리고 시각적인 소통구조를 확립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왔다. 그리고 2025년, 부산시는 세계디자인기구(World Design Organization, WDO)로부터 ‘2028 세계디자인수도(World Design Capital, WDC)’로 최종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서울(2010)에 이어 국내에서는 두 번째, 헬싱키(2012), 타이베이(2016), 발렌시아(2022) 등에 이어 전 세계적으로는 11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부산시는 ‘모두를 포용하는 도시, 함께 만들어가는 디자인(Inclusive City, Engaged Design)’을 주제로 시민 참여 기반의 도시디자인 정책을 내세우며, 도시 문제 해결과 시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디자인 실천 역량과 혁신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번 성과는 시민과 함께 일군 도시디자인의 결실로, 앞으로 디자인을 통해 도시의 삶과 시민의 일상을 새롭게 그려나가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로써 20세기 산업과 기술의 부가가치로서 기능적 역할을 수행했던 디자인의 개념이 오늘날 시민들의 삶을 선도하고, 세계 시민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서비스와 기획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속 가능한 K-디자인을 위해
21세기 한국 디자인은 세계적인 트렌드에 발맞추면서도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K-Pop, K-Drama 등 한류 문화의 확산은 한국 디자인의 글로벌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이제 한국 디자인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답습하는 것을 넘어, 미래를 향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K-디자인의 가치를 확립하기 위해 세 가지 핵심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다양성과 융합 : 경계를 허무는 혁신적인 디자인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 디자인의 미래는 다양한 문화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융합하는 데 있다. 미디어아트, 인터랙티브 디자인,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과 전통적인 감성을 결합하여 기존의 디자인이 가졌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결과물을 창출해야 한다. 이러한 융합은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현대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2. 서사와 경험 : 이야기를 담는 디자인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넘어, 사용자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디자인이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디자인은 사용자에게 깊은 공감과 소통을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VR) 기술을 활용해 한옥의 공간적 미를 체험하게 하거나, 전통 공예품 제작 과정을 디지털 콘텐츠로 만들어 전 세계와 공유하는 등 디자인을 통해 한국의 풍부한 서사를 전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3.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 :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디자인
기후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디자인에서 찾아야 한다. 친환경 소재를 활용하고, 생산 과정에서 폐기물을 최소화하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유니버설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디자인은 단순한 제품을 넘어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 기여하며, 세계 속에서 K-디자인의 위상을 더욱 높일 것이다.
한국 디자인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의 연속이었다. 앞으로도 전통을 단순히 과거의 것이나 우리의 정체성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한국인 고유의 정서와 경험 그리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른 문화와 새로운 시대 속에서도 새롭게 재해석하고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기술과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창의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K-디자인은 더욱 빛나는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